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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팅 캘린더/라이프스타일 트렌드

졸업식에서 꺼낸 필름카메라: MZ가 디지털 '완벽함' 대신 선택한 불완전함

2026.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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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사진

🎓 특별한 날의 기록, 기다림과 물성 

꽃다발과 학사모, 그리고 정든 교정을 떠나는 아쉬움이 교차하는 2월입니다. 스마트폰 하나로 고화질 사진을 언제든 찍을 수 있는 시대지만,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추억을 기록해 보면 어떨까요? 사진 촬영과 인화의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며, 필름 카메라의 감성으로 졸업식 현장을 담는다면 그날의 기억을 손에 잡히는 물성으로 오래 간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찍자마자 확인하고 지워버리는 디지털 사진 대신, 한 장의 셔터를 누르기까지 신중함을 담는 이 과정은 소중한 추억을 박제하는 하나의 의식(Ritual)'이 되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다시 불편한 필름 카메라에 열광할까요?


📷 필름 카메라 생존 연대기: 단절에서 부활로

1) 디지털 전환기(2000년대 중반~2010년대)
디지털 카메라와 고성능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필름 카메라 수요가 급감하면서 캐논, 니콘 등 대형 브랜드들은 SLR(렌즈 교환식 일안리플렉스) 필름 카메라 생산을 사실상 중단했습니다. 캐논은 2000년 출시한 마지막 플래그십 'EOS-1v'를 2018년 공식 단종하며 SLR 생산을 종료했습니다. 니콘 역시 끝까지 자존심을 지키며 'F6' 모델을 생산해왔으나 결국 2020년에 공식 단종하며 메이저 SLR 시대의 막을 내렸습니다.

반면 독일의 라이카(Leica)는 전문가용 RF(레인지파인더) 카메라 생산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비록 가격 접근성은 낮지만, 정교한 메커니즘과 상징적인 디자인 덕분에 필름 유저들에게 여전한 '워너비 브랜드'로 자리 잡으며 아날로그의 명맥을 이었습니다.

라이카(Leica) M6 - 라이카는 2022년 전설적인 모델 M6를 현대 기술로 복원하여 재출시

2) 필름 카메라의 명맥 유지기(2010년대~현재)
필름 카메라는 디지털 시기를 지나며 '감성 사진'이라는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했습니다. 주로 입문하기 쉬운 일회용 카메라와 즉석 카메라가 그 역할을 대신했죠.

    • 코닥 & 후지필름: 저가형 플라스틱 카메라(M35 등)를 꾸준히 공급해 입문자들의 불씨를 살려두었습니다.
    • 인스탁스(즉석 카메라): 결과물을 즉시 손에 쥐는 '물성' 덕분에 디지털 시대에도 매출이 꺾이지 않고 생태계를 지탱하는 거대한 축이 되었습니다.
    • 로모그래피: 실험적이고 독특한 토이 카메라를 개발하며 MZ세대의 예술적 취향을 저격했습니다.

(좌)코닥 M35 (중)인스탁스 미니41 (중)로모그래피 로모크롬 퍼플

💫 디지털 세대가 다시 필름 카메라를 찾는 이유

잊혀가던 필름 카메라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디지털화된 세대인 MZ세대의 손에서 부활했는데요. 디지털의 완벽함이 줄 수 없는 '불완전한 아름다움'과 '기다림의 가치'가 새로운 놀이 문화가 된 것입니다.

  • 감성의 재발견(2015~2017년) : 인스타그램 열풍과 함께 '구닥(Gudak)'은 24컷 제한과 현상 대기 같은 규칙을 앱에 구현해, “필름 같은 촬영 경험”을 놀이로 구현했습니다. 필름 보정 앱이 크게 인기를 끌면서, MZ세대는 ‘필름 감성’을 자연스럽게 인지하기 시작했는데요. 연예인이나 인플루언서들이 일회용 카메라나 빈티지 카메라를 들고 찍은 사진이 공유되며 '필름 감성'이라는 용어가 고유명사처럼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 몰입과 취미로의 전환(2020~2022년) : 팬데믹 시기, 혼자서 깊이 있게 즐길 수 있는 '취미로서의 사진'에 대한 관심이 급증했습니다. 이때 성수동과 을지로를 중심으로 '망우삼림', '고래사진관' 같은 힙한 현상소들이 젊은 층의 놀이터가 되며 셀프 스캔* 문화가 빠르게 퍼져 나갔습니다. (* 셀프 스캔이란 현상소에서 전용 스캐너를 이용해 사용자가 직접 사진의 색감과 밝기를 조절하며 디지털 파일로 변환하는 과정을 말합니다. 단순히 사진을 받는 것을 넘어 자신의 취향을 투영하는 하나의 '놀이'로 정착되었습니다.)

(좌) 망우삼림 (우) 고래사진관 * 출처 : 인스타그램


⚙️펜탁스 17이 보여준 ‘아날로그의 진화’

불과 얼마 전까지 전문적인 필름 카메라를 원하는 이들은 20~80년 된 빈티지 기종에 의지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낡은 기계의 고장과 수리비 부담, 그리고 몇 년 사이 크게 오른 필름 가격(1롤 1만 5천원~2만 원대)은 큰 장벽이었습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리코 이미징(RICOH IMAGING)은 2022년 '필름 카메라 프로젝트'를 선언했습니다. 중고 기기에만 의존하던 시장에 "누구라도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새 제품"을 공급하겠다는 의지였죠. 그 결과물로 2024년 7월 출시된 '펜탁스 17(PENTAX 17)'은 국내 출시 당일 온라인·오프라인에서 빠르게 품절될 만큼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습니다. 

펜탁스 17

펜탁스 17은 단순히 과거의 복원이 아닌, 현대적 요구에 맞춘 영리한 재해석이 돋보입니다.

  • 하프 프레임(한 컷을 반으로 나눠 더 많이 찍는 규격): 한 롤로 72장을 찍을 수 있어 고물가 시대의 경제적 부담을 줄였습니다.
  • 세로형 뷰파인더: 카메라를 정방향으로 쥐었을 때 스마트폰처럼 세로로 사진이 촬영됩니다. 인스타그램이나 숏폼에 익숙한 세대의 시각적 본능을 정확히 관통한 것이죠.

러한 영리한 설계 덕분에 펜탁스 17은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지(TIME)가 선정한 '2025년 최고의 발명품(Best Inventions of 2025)'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타임지는 이 카메라가 기술의 최첨단을 달리는 시대에 오히려 '의도된 수동성'을 제안했다는 점에 주목했는데요. 단순히 과거를 복제한 소품이 아니라, 디지털 시대의 피로감을 해소하고 '느린 기록의 가치'를 현대적인 문법으로 재발명(Re-invention)했다고 평가했습니다.

 

의도된 불편함이 주는 새로운 가치

이러한 변화는 온·오프라인 인프라의 확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이태원의 쇼룸에서 카메라를 미리 체험해보고, 24시간 운영되는 필름 자판기에서 언제든 필름을 구할 수 있죠. 직접 현상소에서 색감을 조절해 디지털 파일로 만드는 ‘셀프 스캔’은 아날로그 유산을 디지털 자산으로 옮겨 심는 새로운 놀이가 되고 있죠. 

모든 것이 자동화된 디지털 세상에서 수고로움을 감수하며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은 그 자체로 '성취감'이라는 상품이 됩니다. 한 번뿐인 졸업식 날, 필름 카메라로 찍는 사진은 그 시절의 나와 우리를 가장 천천히, 그리고 신중하게 남기는 기록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졸업 시즌이 되면, 공식 졸업앨범보다 친구들과 교정을 돌며 필름 카메라·네컷 부스에서 ‘우리만의 졸업 사진’을 남기는 풍경이 더 많이 보입니다. 느리고 번거로운 방식일수록 그날의 감정이 더 오래 남는다는 걸 MZ세대는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 '물성'의 회귀에 주목해 보세요.

디지털 환경이 가속화될수록 고객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실체(Physicality)를 경험하는 과정에서 매력을 느낍니다. 무한 복제가 가능한 디지털 데이터와 달리, 한정된 컷 수 안에서 신중하게 셔터를 누르는 행위 자체에서 '대체 불가능한 순간을 소유했다'는 강력한 심리적 효능감을 느끼기 때문인데요.

기술적 완벽함이 주는 편리함보다, '의도된 불편함'이 만드는 밀도 높은 브랜드 경험이 더 강력한 팬덤을 형성하는 시대입니다. 효율성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 '수고로운 과정'이야말로, 고객이 브랜드를 자신의 삶 속으로 깊숙이 들여놓게 만드는 핵심 장치가 됩니다.